본문 바로가기
건축

한국건축사 성균관의 설립배경 및 역사와 입지조건, 배치 및 공간구성

by Clover Marketer 2022. 3. 6.

성균관은 국학-성균감-성균관으로 숭교방에 터를 잡아 3년만에 성균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서당(초등교육) - 사학,향교 (국립,관립 고등교육) - 소과 응시(생원 집사의 칭호를 얻는 시험) - 성균관으로 교육이 시행되었습니다. 연산군이 집권되고 종종반정과 임린왜란 후 선조 34년 재건을 시작하여 오늘날에 알려진 성균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성균관의 입지

성균관(문묘는) 조선왕조 건국이후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도성 및 주요 시설의 건축을 시작하던 태조 6년(1397년)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그 터를 살펴보게 하였던 것을 시작으로 그 해 3월 한양 동북부 숭교방에 터를 잡고 다음해 7월 창건되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집권 계층인 신진사대부의 이념적 기반으로 역성혁명의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소이자 문묘의 원조 공자의 신위를 모시는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묘의 입지를 살펴보기 앞서 한양의 지세를 먼저 살펴보면, 멀리 백두대간에서 이어져온 지세는 진산임 삼각산에서 응봉에 흘러 도성 내에 이르러 네 개의 줄기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인왕의 줄기로 도성의 우백호를 이루며 남산으로 이어지는 가장 긴 줄이며 다른 하나는 주산인 백악이 흘러 지금의 광화문 근처에서 그치는 가장 짧은 줄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응봉이 흘러 창덕궁과 종묘로 이어져 내려오는 줄기이며, 마지막으로 응봉에서 이어진 낙산의 줄기는 도성의 좌청룡을 이루며 동대문에 이르러 그치는 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각각의 줄기는 도성 내 주요 시설과 연관되어 지는데, 가령 경북궁의 위치는 백악산의 지기가 솟아오른 명당 중의 혈에, 사직단은 우백호의 인왕산 지기가 솟아오른 혈에, 창덕,창경궁, 종묘의 위치는 좌청룡의 응봉 낙산의 지기가 솟아오른 혈에 위치하며, 성균관 또한 응봉의 지혈에 입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주요 건물과 지세와의 이러한 관계는 입지를 정할 때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사상을 중요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묘의 입지에 대한 옛 문헌을 찾아보면 조금 더 알 수 있는데 변계량의 문묘비문에서는 산이 그치고 땅이 넓으며 물이 둘러 흐르는 남향의 자리인 도성의 동북쪽에 터를 정한다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이정구의 문묘비음기에는 강헌대왕이 도움을 정한 처음에는 먼저 문묘와 태학을 세워 터를 한성의 동북쪽 숭교의 골짜기인 산이 둘러싸이듯 껴안고 땅이 넓은 곳에 정하니, 두 물이 두루 흘러 스스로 반벽을 이루는 형국이 참으로 하늘이 지은 영경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증보문헌비고에는 풍수를 잘 보았던 중국 사신 김식이 성균관의 위치를 선정하는데 있어 산수의 형세와 터의 규모 그리고 향이 중요시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균관(문묘)는 또 다른 명칭인 반궁으로도 불리었는데 그 유래는 예기왕제의 천자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는 벽옹이라고하고, 제후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는 반궁이라 하였다'는 말에서 비롯 되어 제후의 나라인 조선에서는 학교인 성균관을 반궁으로 부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벽옹의 벽은 둥근 옥을 뜻하는 벽으로써 원을 상징하여 하늘을 본떴으며, 웅은 둥글게 물로 막고 에워 쌌다는 의미로 교화가 사방으로 퍼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중국은 제후국에 벽옹을 세우는 것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제후의 학교에서는 반궁을 설치하였으며, 반궁인 성균관의 주위에 천자의 절반 밖에 물이 없는 반수가 흘렀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천자의 절반 밖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벽옹에는 사방에 물이 있어 동서남북으로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는 반면에, 반궁에는 남쪽으로 반수가 흐르며 동서로 다리를 놓아 진입하였고 북쪽에는 벽옹과 달리 물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동국여지비고를 보면 반수가 동반수와 서반수로 나뉘어 청계천으로 이어지며, 서반수에는 1개의 교량이 동반수에는 3개의 교량이 위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묘의 반수는 문묘를 반원으로 에워싼 동서의 개천으로 지형 상 처음부터 개천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문묘가 창건된 이후 주변의 소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개천을 확충하였으며, 홍수 시 토사의 유실을 막기 위해 부분적으로 석축을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또 문묘에서 서반수를 건너면 창경궁 후원과 접하여 있어 궁궐과는 집초문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선의 역대 왕들은 유생들의 면학을 권장하기 위하여 불시에 이 문을 열고 나가 성균관을 방문하는 일이 잦았으며, 때로는 문을 열고 유생들을 불러들어 춘당대에 강론과 제술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동반수를 건너면 반촌이라는 마을이 동,남쪽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일종의 대학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728x90
그리드형

댓글